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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itas vos liberabit 8:32
마오의중국과그이후-1부혁명의유산(1) 본문
마오의중국과그이후-혁명의유산
1장 서양제국주의와 중국의 미약한 사회계급
반(反)전통주의, 19세기 중반의 태평천국운동과 20세기 중반의 공산주의혁명의 중요한 공통점입니다. 혁명주도자들은 수천년간 내려온 전통의 수호자가 아닌 파괴자를 자청하였습니다. 이는 중국 근현대사 통틀어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현상이니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 혁명가들은 서양의 급진적인 사상과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여서 이를 기반으로 전통적인 삶과 근본적으로 갈라설 것을 제시했습니다. 혁명의 관심은 언제나 중국의 그 당시의 고난과 미래에 있었으나 목적은 낡은 전통을 어떻게 계승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완전히 묻어버리는가였습니다
그러나 사상과 이데올로기만으로는 혁명은 커녕 혁명이 가능한 토대도 만들어내기 힘들었습니다. 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중국의 현실이었습니다.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무너져가고 있는 중국의 현실은 근대혁명적 상황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근대혁명의 완성을 저해하는 아이러니한 것이었습니다. 서양 제국주의는 자체적으로는 세계사적인 근대혁명을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은 중국 사회를 깨부수는 데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분명 서구열강의 침략은 낡아빠진 중국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전통적인 정치구조와 경제질서의 상당부분을 붕괴시키고 변형시켰습니다.
근대중국 부르주아지가 탄생하기는 했으나 그들은 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미약했으며 외국 세력에 크게 의존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중국과 세계자본주의 시장의 대리인 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즉 외국자본주의의 확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입니다.
프롤레타리아트 계층 역시 수가 적고 영향력이 없는 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회구조가 말해주듯이 근대중국의 모든 사회계급은 미약했다는 것이 큰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비록 맹아단계이긴 하지만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등장은 전통적 계급인 신사-지주 계급의 권력을 약화시켰습니다. 황제 관료국가가 제국주의에 의해 약화될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농민을 착취하는 등의 전통적 방식을 고수하며 남아있었고 결국 그들 중에서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거나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는 '엘리트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지배적이었던 사회계급이 무너지면 새로운 사회계급이 등장하는 것은 서양의 경험으로 보면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즉 새로운 자본주의 생산력과 교환력의 등장, 귀족세력의 붕괴, 그리고 근대 자본가가 결국 사회정치적 지배를 획득하게 되는 시기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달랐습니다. 신사층은 날로 쇠퇴하고 있었으나 새로운 사회계급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근대중국의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은 너무나도 미약했습니다.
중국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농민이 있었으나 그들의 삶은 여전히 예전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불만을 정치적으로 구현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미약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떤 사회적 계급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모든 사회적 계급이 미약한 상태에서는 정치적힘은 점점 사회계급으로부터 독립하여 사회 전반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띱니다.
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역시 특정 계급의 사회적 이해를 반영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지주와 상하이 은행가들이 국민당과 결속이 되어 있지만 사실 국민당이 그들에게 의지하는 것보다도 훨씬, 지주와 은행가들의 국민당의 군사적 힘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중국공산당 역시 농민의 지지를 얻었지만 결국 농민의 당은 되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사회계급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정치와 정책이 결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군사적 권력의 소유자들이 사회계급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그 당시 역사적 상황이었습니다.
근대 중국의 상황은 역사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이었으나 혁명적 잠재력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혁명적 잠재력은 지적-정치적 엘리트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고 그들의 등장으로 인해 급진적인 성향으로 바뀌어 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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